[조선시대 식인(食人)에 관하여]
선조 9년 6월 26일, 선조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하는 일을 조를 시켜서 공사로 삼아라.”
결국 현상금을 걸어 신고하고 체포하도록 특명이 내려졌다.
당시 사람의 고기와 간담이 창질(피부에 나는 질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치료하는 특효약이라고 해서 비싼 값으로 팔리는 일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힘없는 아이들이 유괴되어 살해당하는 것은 물론, 어른이라고 해도 혼자서 길을 걷노라면 잡혀서 배가 갈리고 쓸개가 빼내어졌다.
이런 일이 거듭되다 보니, 인적이 드문 산의 골짜기에는 나무에 묶인 채 배가 갈려 죽은 사람들이 줄줄이 널려 있어,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섰는데 나무마다 배가 갈린 시체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면, 어느 나무꾼이 그걸 보고 싶어 산에 들어갔을까.
행여나 그런 무도한 일당들과 마주친다면 이번에 배가 갈리는 것은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나라에서 직접 나서서 사람 배를 갈라 간과 쓸개를 빼어가는 이들에게 현상금을 내걸었던 것이다.
아직 임진왜란이 시작되지도 않은, 굳이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평화로운 조선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사서에는 창질, 나질(나병균에 의하여 감염되는 만성 전염병) 등으로 기록된 질병은 문둥병, 나병, 혹은 한센병이라고도 한다.
나병은 피부가 썩어 들어가고 신체 일부가 없어지는 끔찍한 증세 때문에 인간의 역사상 혐오의 대상으로 다뤄졌다.
이스라엘의 성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진시황 시대의 법률문서에서도 나환자들을 격리시키는 규정이 나와 있을 정도로 오래된 질병이다.
한국에서도 소록도가 생기기 전까지, 나환자들은 이리저리 떠돌면서 걸식하고, 온갖 악평을 들으면서 감금되었고, 돌팔매질도 당했으며 때로 죽임까지 당하는 가혹한 대우를 받아왔다.
현대의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나병은 전염이 되지 안되는 병이고 도중에 치유되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는 물론 아직까지도 이런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 대신 오래전 속설에서는, 어린아이의 간이 나병의 특효약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있었다.
당연히 나환자들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고, 그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는 소문은 심심치 않게 전하고 있다.
명종 19년에는 상주(尙州)에서 정은춘(鄭銀春)이라는 사람이 같은 동네의 일고여덟 살 먹은 아이를 꾀어 산에 들어가 배를 가르고 쓸개를 꺼내 살을 구워먹은 일이 벌어졌다.
기록에는 병명이 나와 있지 않지만, 정은춘은 아마 나병이나 기타 난치병 환자였을 것이다.
명종은 이 사건에 크게 놀라 자세히 취조하도록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런데 사람을 약으로 쓰는 방법이 완전히 근절되기는커녕 오히려 유행했다.
명종 21년에는 좀 더 참혹한 현실이 기재되어 있다.
당시 서울에는 사람을 죽여서 쓸개를 빼내어 가는 일이 많이 있었고, 이로써 처벌을 받은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방종한(제멋대로 행동) 생활 덕에 창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떤 의관이 사람의 쓸개로 치료하면 병이 낫는다고 말하자 사람을 죽여 배 가르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도성 내의 동활인서(東活人署), 보제원(普濟院), 종루(鍾樓) 근처에는 걸인(거지)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종루는 지금의 종로이고, 나머지 장소들은 모두 걸인이나 부랑자, 병자들에게 먹을 것과 약을 나눠주는 구제기관이었다.
하지만 약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이들 걸인들을 하나 둘 잡아가 쓸개를 빼내 죽였고, 불과 4~5년 만에 길거리에는 걸인들이 한 명도 남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걸인들은 아무 기댈 곳 없어 이런 곳에 찾아온 이들이었으니 하나나 둘쯤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걸인이 모두 사라지자, 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손을 뻗치게 되어 당시 사람들 중에서 아이를 잃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어째서 간을 빼내어 갔을까?
이는 장기 중에서도 간, 그리고 정확히는 쓸개가 가장 약효가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웅담(곰의 쓸개)을 보면 알 수 있듯, 동물의 쓸개는 가장 귀중한 약재 중 하나였다.
조선팔도 곳곳의 특산물을 기재한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곰은 물론이요, 소, 돼지, 잉어, 담비, 고슴도치의 쓸개들이 주요 특산물로 많이 기재되어 있다.
동물의 쓸개도 좋은 약일진대, 사람은 어떠할까. 그런 믿음에서 나온 게 아닐까.
세조 시대 때는 신숙주가 함길도에서 올린 장계에는 사람 쓸개를 약으로 쓴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변경의 여진족 올적합(兀狄哈)을 피해 도망쳐온 중국인들의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여진족 중 화살 맞은 사람이 많자 중국인들의 쓸개를 빼내 독을 치료하려고 하여 도망쳤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장기가 꼭 나병뿐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약재로도 쓰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사람 쓸개를 빼내어 중국에 팔아 돈을 챙긴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꽤나 오래된 소문인 것 같다.
선조 시대 때에는 이런 소문이 너무도 크게 번졌다.
평소라면 그냥 말썽을 피우고 지나치게 노는 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했을 법한 이야기가, 이제는 도성 안을 떨게 만들고 민심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왕이 직접 사람 간을 빼어가는 범인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정도가 더 심각했던 것은 선조 40년 5월이었다.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간담을 빼어간다는 소문이 번졌고, 당시 서울에서는 사람이 혼자서 다니지 못하고 무리를 지으며 다녀야 했다.
게다가 이런 소문은 전국적으로 번져서 아녀자들은 물론 선비들까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숨어 다녔다.
사람들은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농부들은 농사를 그만두었다. 한마디로 온 백성들이 온통 두려움에 떨었다.
과연 사람의 간담이 약효가 있었는지, 그것을 빼가는 조직이 있었는지 분명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는 살인자들을 잡으면 큰 상을 주겠다는 방을 걸었다.
심지어 사간원에서는 사람을 죽여 간을 빼내어 가는 범인들을 열심히 잡지 않는다는 이유로 좌, 우 포도대장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기도 했다.
포도대장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냐 하겠지만, 사안은 위중한데 쉽게 해결되지 않으니 사람들의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 책임을 물은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선조 시대 때에 이 같은 식인의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겁에 질려 사회가 불안해지기까지 했을까.
사람을 죽여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평화로울 때나 어려울 때나 심심찮게 존재했다.
그런데 이것이 나라를 뒤흔들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평범한 사실은 아니다.
여기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
사람의 쓸개를 빼어가는 소문은 반드시 가뭄, 그것도 전국이 타 들어갈 만큼 심각한 가뭄과 맞물려서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소문이 돌았던 선조 10년에는 심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는 등 법석을 벌였고, 같은 소문이 돌았던 선조 40년에는 훨씬 더 정도가 심해서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4월부터 날씨가 가물었지만, 나라는 느직느직 준비를 해서 5월 초에야 겨우 기우제를 치렀다.
기우제를 벌인다고 해서 반드시 비가 오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가 기우제라도 벌이는 것과, 그저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어차피 하늘이란 현대 과학의 힘으로도 정확한 일기예보를 할 수 없을 만큼 제멋대로이다.
하지만 불행한 일이 거듭되고 조금도 나아질 기색이 없는데, 아무 희망조차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불안해지게 된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옛날에는 너무나도 미운 대상을 두고, 살점과 간담을 씹고 싶다는 표현을 썼다.
장군들은 물론이거니와 선비들도 적군이나 혹은 정적들을 이야기할 때 쓰는, 일종의 관용어구였다.
그런데 이게 속담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실행하는 사람이 꽤 있었던 것 같다.
성종 시대 회령진의 장수 신수무(辛秀武), 정산로(鄭山老) 등은 항복한 여진족 이거을가개(李巨乙加介)와 그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그 자리에서 배를 갈라 쓸개를 꺼낸 일이 벌어졌다.
이거을가개와 매번 대치하고 있었던 변경의 장수들로서는 많은 원한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람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낸 엽기적인 행태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동시대의 장수 소기파(蘇起坡)의 경우도 있다.
그는 여진족과 왜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지만, 중종 때 왜군이 조선을 공격해 들어왔을 때 이를 물리치고, 적병을 죽인 뒤 쓸개를 빼먹고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태연하게 술을 마셔 ‘소야차(蘇夜叉)’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때의 ‘소’는 그의 성에서 따온 말이다.
불교에서는 악귀를 잡아먹는 무서운 귀신을 야차라고 하니, 왜군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사람들마저 소기파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철천지 원수를 두고 간을 내어먹고 뼈를 갈아 마시고 싶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아마도 앞에서 든 예들은 그런 행동들이 그저 표현에만 그치지 않고 정말 실행해버린 경우일 것이다.
변경에서 하루하루 여진족과 싸워왔던 장수들은 전우와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수도 없이 목도했을 것이고, 그 사무치는 원수를 갚고자 원한을 불태웠을 것이다.
동료의식은 사람을 강하게 하고, 잔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전쟁터에서 벗어나 있던 도성의 관리들이 보기에, 이들의 식인 행위는 커다란 문화충격이었을 것이다.
조선과 여진족의 관계라면, 세종 시기의 4군 6진의 개척 외에 별다르게 기억된 것이 없어 막연히 우리나라의 영토였겠거니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그 지역의 병사들은 수백 년에 걸쳐 여진족과 싸워왔으며 다치고 때로 죽어갔다.
사람의 배를 가르고 쓸개를 먹는 것은 죽어간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라면 일부러 무시무시한 행동을 하여 소문을 내고, 이로써 적군에게 겁주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적군이 겁에 질려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쪽은 한결 싸우기 편해진다.
그러나 이런 사료만을 보고 조선의 군대 내에서 식인의 풍습이 일반적이었다는 생각을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저작권자 VONVON/ 무단복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위반 시 법적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