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종교에 빠져 노숙자로 전락한 한 남성의 사연이 공개됐다.
과거 TV조선 ‘구조신호 시그널’은 이단 종교에 빠져 노숙자로 전락한 국가대표 농구 선수 출신의 남성을 소개했다.
사연의 주인공은 올 해 54세인 추한찬씨다.
한 때는 국가대표 농구 선수로 활약하며 ‘농구 천재’ 소리도 들었다는 그는 대학 시절 건강 문제로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30여 년을 방황하고 현재는 서울역 노숙자로 전락했다.
제보를 받은 ‘구조신호 시그널’ 제작진은 한찬씨를 만나러 갔다.
한 눈에 봐도 2m가 넘어 보이는 큰 키의 소유자인 그는 평소 “내가 국가 대표였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한찬 씨는 길에서 어딘가 이상한 행동을 계속 한다.
빙빙 돌며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도 하고,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제작진이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묻자 그는 태양을 보고 얘기했다고 답하며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스스로를 ‘삼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찬 씨는 혼잣말로 “나 대한민국 대통령 출마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한찬 씨의 지인은 그가 국가대표 허재의 선배였으며, 농구 선수였다고 설명했다.
추 씨 역시 스스로 “허재와 친구였다”고 밝혔다.
실제로 확인해 본 결과 추한찬 씨는 아시아 청소년 국가대표, 88올림픽 농구팀 주니어 상비군 등으로 활약한 농구 유망주였다.
1980년대 농구 스타 한기범 씨도 추 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선수도 “우리나라에서 한기범에 이어 두 번째로 키가 컸다”고 전했다.
매일 태양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대화를 하는 것 부터, 길거리에서 괴성을 지르며 찬송가까지 부르는 그는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현재 그가 지내는 터전은 인근의 한 교회 노숙인 쉼터였다.
방이라고 하기엔 협소한 공간에서 낡은 성경책을 끼고 산다.
4개월 전 부터 추 시는 구하동 목사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보일러 기름과 가스가 끊겨 씻는 것 부터 곤욕이다.
한찬씨의 오른 손은 공장에서 일을 하다 사고를 당해 비틀려 있었다.
현재 그의 통장 잔고는 2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생필품조차 사기 힘들어 남들이 쓰다 버린 샴푸와 린스를 주워서 사용한다고.
앙상하게 마른 몸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수술자국도 있었다.
대학교 때 기흉 수술을 받은 이후 마르팡 증후군으로 또다시 수슬을 받았기 때문이다.
건강 문제로 꿈을 접은 이후 힘들게 삶을 이어온 그.
그는 “병원 얘기 하지 말라. 아버지(하느님)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며 병원에 가는 것 조차 거부하고 직접 약을 조제한다.
13여년 정 한찬 씨는 병을 고쳐보겠다며 한 기도원을 찾았다.
이 기도원은 이단으로 등록된 곳이었다.
그곳에서 13여년을 지낸 그는 자신이 잘못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깨닫고 빠져나왔다.
그러나 아직도 한찬씨의 뒤틀린 믿음은 계속되고 있다.
수소문 끝에 제작진은 추 씨의 부모님을 찾아갔다.
농구 선수로 활약할 당시 그는 집안의 자랑거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의 방황은 시작됐고, 농구를 하지 못한다는 좌절감이 클 것이라고 생각해 그대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고 그의 아버지는 설명했다.
사방에 어둠이 깔린 한 밤 중 그는 어디론가 나갈 채비를 한다.
잠자리에 들어도 깊은 잠을 자기 어려워 매일 외출을 한다고.
그는 이웃 할머니가 폐지를 줍는 일을 매일 돕고 있다고 한다.
일을 도우며 한찬씨도 필요한 물품을 주워간다.
아침이 밝자 한찬 씨는 서울역에 나와 청소를 한다.
그는 “여기가 제 고향보다 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찬 씨의 괴이한 행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자꾸만 미행을 당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본인이 돌린 운동 기구가 신의 힘으로 돌아간다, 태양의 힘을 받아 기구를 들 수 있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했다.
망상 증상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고성방가까지 해 인근 주민의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제작진은 정신의학과 전문의를 투입했지만 한찬씨에게 말을 거는 것 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전문의는 “조현병 상태는 아니라고 본다”며 “알코올 문제와 기분 장애가 의심된다”고 설명했다.
제작진은 한찬 씨에게 농구공을 안겨주었다.
농구공을 받은 그는 인근의 한 고등학교 농구 골대 앞에 섰다.
공을 잡은 그는 기괴한 행동을 하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선수로서 노련한 면모를 선보였다.
약 30년 만에 농구공을 다시 잡아 보는 것이라고 한다.
1991년도 필리핀 선수들에게 코치를 해준 것이 그의 농구 인생의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한찬 씨는 “전국추계농구연맹전에 주전으로 출전해 준우승을 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해당 경기에서 한찬씨는 득점왕에 올랐다.
과거 지인들은 한찬씨를 보며 “그 친구를 말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말 할 사람 아무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남들보다 선수 생활을 늦게 시작해 열등감이 컸던 한찬 씨는 과거 숙소를 이탈하는 등 철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한찬씨는 “(내가 농구 선배로서 역할을 못한 게) 미안하다”며 “내가 몸이 아픈 게 문제가 아니었다. 뛸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포기했다”며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제작진은 그와 함께 다시 병원에 찾아가 사고로 비틀어져버린 손을 진단했다.
상태는 좋지 않지만 다행히 악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무리하게 운동하면 혈관이 파열될 수 있는 마르팡 증후군 진료도 받았다.
한찬 씨는 4번에 걸쳐 이 증후군을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했고 경과 역시 좋아 농구 코치로 일 할 수 있다고 한다.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한찬 씨는 깔끔하게 머리를 자르고 단장한 뒤 부모님을 찾아갔다.
아버지를 보자마자 그는 어린아이처럼 오열했다.
어머니는 울고 있는 아들을 안아주며 “괜찮다. 욕봤다”며 따뜻하게 달래줬다.
이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푸짐한 밥상을 차려줬다.
어머니는 “밥은 먹고 사나, 얇은 옷만 가져갔고 날이 추워지는데, 옷은 있나. 걱정 마를 새가 없었다”고 아들을 걱정하던 마음을 전했다.
이어 제작진은 고교시절 한찬 씨가 속한 농구부 감독이었던 임형규 씨를 만났다.
그는 한찬 씨를 처음으로 농구부로 이끌었던 선생님이다.
임 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 중 하나였다. 그 당시는 미래를 밝게 봤다. 고생만 좀 하면 우리나라 대표 선수가 되겠구나. 내게 좋은 소식이 오길 바랐다”며 “그래서 속으로 ‘이 녀석이 못 견뎠구나’ 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한찬이가 내게 너무 많이 혼나 내가 미울 것이다.아주 가혹하게 혼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키 크고 농구 잘 하는 선수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라고 말했다.
농구 코치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한찬씨는 과거 알고 지내던 한기범 단장도 만났다.
한찬 씨는 한기범 씨에게 “대동맥 소동맥이 다 터졌다. 그래서 수술을 몇 번이나 했다”며 상처를 보여줬다.
한기범 씨는 이에 “나도 수술을 했다. 경과가 좋아 괜찮다”고 답했다.
한기범 단장은 오랜만에 코트에 설 후배를 위해 농구화도 내어 주었다.
같은 병이 있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기범 단장을 보며 한찬 씨는 많은 생각이 스치는 듯 했다.
일일 농구 코치로 농구 코트에 선 한찬 씨는 학생들 앞에서 멋지게 시범을 보였다.
한기범 단장은 그 모습을 보며 추 씨에게 코치의 가능성이 있는지 체크했다.
한찬씨의 새로운 내일을 위해 한기범 단장은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추한찬!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이 좋다. 이 기회에 네가 하고 싶은 걸 다 이뤄가라. 파이팅”이라고 응원을 불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