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천안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운동을 천안에서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1919년 이화학당의 18세 소녀였던 시기였다. 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모진 고문과 영양실조로 처참하게 19세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지금 유관순 열사를 ‘유관순 누나, 유관순 언니’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그녀의 복원된 고화질 사진을 살펴보면 언니, 누나라고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린’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유관순 누나 고화질 복원사진’이라는 제목의 글이 사진과 함께 올라왔다.
그녀의 고화질 사진을 직접 만나보자.
#1 이화학당 입학 직수. 13세(추정)
#2 이화학당 졸업사진, 16세(추정)
#3 1920년 서대문 형무소 수감 당시, 18세 (고문으로 인해 부은 얼굴)
#4 연필 스케치 버전
해당 게시글을 접한 네티즌들은 “사진만 보는데 눈물이 난다”, “누나누나 했지만 진짜 앳되다”, “그저 감사합니다…”등의 반응을 보였다.
아래는 해당 게시글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이다.
1. 전세계 17살 소녀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받친 것은 잔다르크와 유관순 열사 뿐임.(3.1운동 당시 만16세 3개월)
2. 이화학당의 동기들과 5인 결사대 조직하여 만세운동하다가 경찰서 끌려간 후 온갖 협박과 고문 당하심. 학교장인 외국인 ‘프라이’의 간곡한 부탁으로 석방되어 집으로 내려감.
3. 천안으로 내려가서 부모님과 동네 유지 4분이랑 만세운동 계획
4.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하다 현장에서 부모님 두분이 즉사.
5. 유관순 열사는 옆구리에 칼로 찔린채로 머리채를 잡힌체 일본 순사에게 끌려감.
6. 1심에서 일본시민으로 충성하면 석방해주겠다는 재판장에게 의자 집어던져 법정 모독죄 추가.
7. 1심에서 7년형 인도 받음.(33인보다 더많은 형을 언도받음)
8. 2심에서 3년형으로 감형
9. 상고하지않음 ‘나라가 없으니 어딜가도 갇혀있는 것이나 마차가지라 상고하지않겠다’
10. 악명 높은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
11. 칼에 찔렸던 옆구리에서 계속 피고름이나고 썩어감.
12. 감옥에서도 여전한 항일 정신으로 모진 고문이 계속됨.
13 고문 : 손톱을 다 뺀지로 뺌, 고추가루 탄 물을 코에 붓고, 17살 소녀를 발가벗겨 매달아 때림.
옆구리 칼에 의한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않았음
14. 3.1절 1주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만세운동 주동함
15. 감형 받고 출소 2일전 모진 고문에 방광이 터져 사망.
16. 아무도 시체를 안찾아감.
17.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집안은 풍비박산나서 거두어 갈 사람이 없었음. 주변 지인들도 일제의 협박에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않음.
18.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인도함.
19. 출소 할꺼라 믿었던 이화학당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새옷과 머리 핀을 준비했었음.
20. 그러나 죽은지 10여일이 지나 시신으로 돌아옴.
21. 그날 이화 학당 교정이 썩은 내로 진동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