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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학자가 음탕하고 충격적이라고 기록한 일본의 ‘남창’ 문화


신유한은 숙종 45년(1719년) ‘조선통신사’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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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양한 풍습과 문화를 글로 남겼다.

그런데 그가 관찰한 것 중에는 일본의 ‘남창 문화’도 있었다.

당시 일본은 많은 남성들이 미소년 ‘남창’과 성행위를 즐기던 시기였다.

주인 몰래 여성과 입 맞추는 미소년 / 니시카와 스케노부 作

이 풍속에 놀란 신유한은 당시 일본 최고의 유교 학자였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에게도 “당신도 남창을 하시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메노모리는 “그 좋은 걸 아직도 안 해보셨단 말씀이시오? 허허허!”라며 충격적인 답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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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한은 자신이 본 충격적인 일본의 ‘남창’ 풍습을 기행문 ‘해유록’에 상세히 남겼다.

‘해유록’에서는 “(일본의) 남창은 요망스럽고 아리따움이 여자보다도 곱다. 그 풍속이 음탕하고 이에 빠지는 것이 여자보다 배나 더하였다”라는 묘사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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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왕은 물론 귀족과 부자, 백성에 이르기까지 남창과 어울리지 않는 자가 없었고, 심지어 서로의 남창을 질투해 죽이는 자까지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무라이의 시중을 들고 있는 여장 미소년 / 히시카와 모로노부 作

‘와카슈도(若衆道)’ 불리는 일본의 남창 문화는 당시 일본에서는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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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와카슈도’는 메이지유신 이후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일본 곳곳에서 남창 매춘이 성행하기도 했다.

여장한 미소녀와 입 맞추는 사무라이 / 미야가와 잇쇼 作

이는 1946년에 발간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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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선 유학자의 눈에는 와카슈도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유교 문화가 뿌리 깊었던 조선에서 동성애는 음양의 이치를 벗어난 부도덕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해유록의 묘사를 보면 신유한이 얼마나 아연실색했는지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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