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
2008년 4월 27일, 그곳엔 역사상 유례없는 대사건이 터졌다.
중국인들이 자기들 나라도 아닌 대한민국, 그리고 수도인 서울에서 대규모 무차별 폭력시위를 열었던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2008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 현장서 중국의 티베트, 위구르 유혈 점령과 탄압에 대해 항의하는 시민단체를 ‘무력 진압’.
폭력적이라고 알려진 중국인들은 막대기, 쇠 파이프, 펜치 등 이른바 연장을 들고 나타난 이들은 시민·경찰·전경 가리지 않고 공격했고, 중국 시위대가 던진 나무토막에 맞아 피를 흘리는 이까지 속출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현지 공안에게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말 한 번 조심하겠다고 도망이라도 치는데 민주적으로 진압하는 한국 경찰 앞에서는 비겁하고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자국민이 중국인들에게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본 이명박 전 대통령은 크게 분노했지만 대처는 부드러웠다.
강경적으로 대처를 한다면 외교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떠나서 중국내에서 한인들이 보복 폭행을 당할 확률이 더 크게 때문이다.
당시 법무장관이던 김경한 장관은 “법과 원칙에 따라 사안을 처리하겠다”라며 “폭력 행사자 및 배후 주동자의 인적 사항 확인 휘 혐의를 조속히 규명하는 등 검거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전하면서”한중 우호관계는 존중하겠으나 불법행위를 저지른 중국인들은 엄단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강제추방 조치도 고려 중이다”고 설명했다.point 304 | 1
그리고 실제로 강제추방 조치도 이뤄졌다.
현재 정권에선 꿈도 꾸지 못할 대처로 재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국내법에 따라 처벌하려는 움직임도 이어졌다.
분노한 대통령의 뜻에 따라 검찰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법을 어긴 중국인들을 처벌하기 위해 구속영장도 청구했다.
비록 법원이 “도주 우려가 없다”라며 영장을 기각하는 일이 빈번했지만 정부 차원의 처벌은 멈추지 않았다.
해당 사건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식을 바꾸고 반중 감정이 시작됐으며 중국인들도 한국을 무시하고 ‘빵즈’라는 한국인 비하 발언을 하면서 조롱하기 시작했다.
현재 재조명되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 당시 아덴만 여명 작전
때는 2011년 1월 15일, 소말리아의 해적에게 피랍된 1만톤급 화물선 삼호 주얼리(SAMHO JEWELRY)호 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대한민국 주도 아래진행된 대한민국, 미국, 오만, 파키스탄 해군의 연합작전.point 190 |
일명 아덴만의 여명 작전이라고도 불린다.point 18 | 납치 6일만인 2011년 1월 21일 청해부대 소속 UDT/SEAL 팀의 급습으로 해적 8명 사살, 5명 생포와 동시에 인질 21명 전원 구출의 성과를 낸 우리군이 해외에서 수행한 최초의 인질구출 작전이다.point 106 |
한국 선원 8명을 비롯해 미얀마인 11명, 인도네시아 2명 총 21명의 선원 모두를 구출하였다.point 41 | 1
2011년 1월, 삼호 주얼리 호가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당했다. 선원들은 해적의 접근을 보고 재빨리 선미의 로프 저장창고로 대피했으나 3시간 15분 만에 뚫렸고 해적들은 배를 소말리아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더 이상의 납치를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명박 대통령은 청해부대(당시 지휘관 해군 항해대령 조영주)에게 해적 소탕과 인질 구출을 명령했다.
요약
1.2011년 1월, 우니라나 1만톤급 삼호 주얼리호가 아프리카의 아덴만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
2. 구출 1차 작전 게시) 주변에서 훈련 중이던 최영함이 즉시 구출을 위해 삼호주얼리호로 출발, 이틀 뒤 주얼리호의 30km까지 접근.
(1차 작전은 대통령의 승인 없이 소말리아 해적 4명이 보트를 타고 인근의 몽골 선박을 피납하기 위해서 내려오는 과정에 링스헬기로 저격을 하면서 시작됨)
3.이후 해적들이 모선과 합류하리라는 첩보를 받고 합참의장이 국방부장관(김관진)에게 승인을 받고 당시 대통령이던 이명박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서 여명작전을 실행.
4.해군 UDT/SEAL 삼호 주얼리호 진입 등반
5.공격팀 선교 완전 장악
6.첫 인질 구출하게 되고 인질 21명 전원 구조 ‘아덴만 여명 작전’ 종료
(그 결과 해적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8명의 해적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했으며, 대한민국 해군의 사망자는 없었다. 다만 선장이 복부에 관통상을 입음)
7.point 61 | 관통상을 입은 석선장은 읍급 처치 후 오만의 술탄카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11시간 만에 서울공항에 도착하고 아주대학교병원으로 옮겨져 ‘이국종 교수’에게 치료를 받았다.point 148 |
(이때 야당은 해군 대원들의 총에 석선장이 맞은거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며 지적했지만 석선장이 무사히 깨어나면서 아니라는 것이 밝혀짐.point 59 | .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하는데 또 정치질 ㅋㅋ)point 79 | 1
가장 성공적인 대테러 작전 이후…
석 선장은 완쾌하고 이명박 대통령께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고, 해군 충무공 훈련원에서 3급 군무원으로 일함.
1월 21일 대한민국 해군 최영함이 주도한 아덴만 여명작전은 새벽 4시 58분에 시작해서 약 5시간만인 오후 2시 56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point 1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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